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리스 옐친 (문단 편집) === 대통령 === [[파일:attachment/소련 보수파 쿠데타/thisisrussia.jpg]] * [[http://blog.naver.com/spartacus2/memo/80073951934|옐친의 반쿠데타 연설 전문 - 전차 위의 연설]] 1991년 8월 보수파들이 8월 쿠데타를 일으키자 옐친은 러시아 시민들에게 실력 행사를 호소, 보수파의 쿠데타를 막아 내면서 소련을 장악할 수 있었다. 당시 소련 정부는 개혁파였던 고르바초프와 보수파였던 [[겐나디 야나예프]],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Владимир Крючков, 1924년 2월 29일 ~ 2007년 11월 23일) 등 두 세력 모두 쿠데타로 인해 몰락한 상황이었고, 중앙정부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옐친은 이 공백을 이용해 고르바초프와 보수파의 지지 기반이었던 소련 공산당을 압박하여 정국을 원하는 대로 주도해 갈 수 있었다. 1991년 12월 21일 옐친은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등의 지도자와 [[벨라루스]]에 있는 [[벨로베즈스카야 숲|벨라베자 숲]](Белавежская пушча, Biełaviežskaja Pušča)에서 만나 함께 [[소련 해체|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하고 [[독립국가연합]]의 결성을 선언했다. 조약 체결 이후, [[12월 12일]]에 러시아 최고 소비에트는 1922년의 소련 수립 조약을 폐기하였고, '[[주권국가연맹|신연방]] 조약'의 체결을 준비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사임하게 되었다. 새 러시아의 대통령이 된 옐친은 경제 개혁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그나마 간신히 지탱되던 경제를 빈사 상태로 몰아넣었다. 원래 러시아 경제는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추진한 경제 자유화의 후유증을 떠안으면서 거의 [[파산]]에 가까운 수준이었지만,[* 사실 소련은 1990년부터 이미 경제 체제가 거의 마비되어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예고르 가이다르(Егор Гайдар, 1956년 3월 19일 ~ 2009년 12월 16일)가 추진한 경제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예금동결과 가격 자유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실패해 버렸다. 사실 고르바초프 시절 추진한 가격 자율 지정화[* 국가가 가격을 정하지 않고 생산자가 가격을 정하는 것. 자본주의 국가에서라면 이미 당연한 논리겠지만,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국가에서 국영화된 생산 시설(공장, 농장 등)을 통해 가격을 책정, 도시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고 있었다. 이는 현실공산주의 경제의 가장 기초적인 경제원리였다.]로 인해 이미 후유증이 컸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가이다르의 개혁은 너무 조급하고 낙관적이었다. 가격지정 자율화는 국영기업들의 생산성을 늘릴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되려 기업들은 국영상점에서 팔아야 될 물건을 농민시장에 내다파는 식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값싸게 물건을 사려면 발품을 수시로 파는 것이 일상이 되는 등 유통구조가 왜곡되었다. 가이다르는 기업들이 난잡한 유통구조를 이용해서 수익을 창출하는 행태나 타 동유럽 국가에서 가격자유화로 인한 임금 및 자산손실이 엄청났던 점을 감안하지 않고 가격자유화를 시행한 결과 물가를 수십배 이상 폭등시켰다. 소련 루블의 가치는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이후 물가를 잡겠다고 시행한 예금동결까지 겹쳐 대다수의 국민들은 자산손실과 실질임금 하락으로 빈곤층이 되어버렸다. 또한 이러한 조치는 구 소련에 속한 나머지 14개국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가이다르의 경제 개혁 실패로 러시아의 [[GDP]]는 추락했고, 소련 시절 국가의 지원으로 유지되던 수많은 국영기업, 공장, 콜호즈들과 연구소들은 예산이 대대적으로 삭감되면서 몰락했으며 예금은 초인플레이션과 예금동결로 휴지조각이 되고야 말았다.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경제 주체들이 사라지고 예금이 휴지조각으로 변하자 대다수의 러시아 국민들은 임금체불과 사회복지예산 삭감까지 겹치며 빈곤과 실업의 늪에 빠져야했으며, 오직 [[올리가르히|소수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만이 모든 부를 누릴 수 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1_97.jpg|width=5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2_59.jpg|width=5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3_39.jpg|width=500]]}}} || 1993년 옐친은 재신임에 성공한 직후 9월 21일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권을 부여하고, 기존 소련 체제의 잔재였던 인민대표회의와 최고회의를 폐지하고 상하원을 신설하는 개헌을 시도했다. 이에 다수당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 등이 9월 23일 [[국회의사당#s-1.6|러시아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옐친을 '''탄핵'''하자, 분노한 옐친은 10월 4일 [[모스크바]]로 육군 병력을 소집했고, 모스크바 군구 타만스카야 사단의 [[T-80]] [[전차]]들을 데려다 '''[[내가 지금 전차를 몰고가서|국회의사당을]] [[상남자|포격해버렸다]]'''[[https://www.youtube.com/watch?v=CnkCu7N-J0M|18분 30초부터 나온다.]]'''[[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항목 참조. 2년 만에 전차 앞에서 맞서던 입장에서 전차를 끌고 가서 포격하는 입장이 된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 이 때 군부가 옐친을 지지하면서 옐친은 빠르게 상황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적잖은 사상자가 나면서 러시아 국민들은 옐친에게 크게 실망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 공식 통계 추산 사상자 187명, 최고회의 추산 약 2,000명 가량으로 집계했다.] 결국 그 해 1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옐친파 정당은 고작 15.5%의 득표를 올리며 패배했으며, 극우정당인 [[자유민주당(러시아)|러시아 자유민주당]]이 23%로 제1당이 되었다. 공산당-농민당 연합도 22%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정파는 대다수가 사민주의 정파였다. 1995년 12월 의회에서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22%를 득표하며 1당이 되었다. 11%로 자유민주당이 2당을 차지했으며 10%의 여당 '러시아 - 우리집'[* 옐친은 임기 내내 무소속이었으므로 여기서 여당은 옐친 지지 정당을 말한다.]은 3당에 그쳤다. 하지만 [[비례대표제]]의 특성상 어느 한쪽도 과반을 유지할 순 없었고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 이런 기조는 1999년 총선까지도 이어지지만, 1999년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이 선전하고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들어서면서 정치는 안정된다. 거꾸로 말하면 이전까지 러시아는 혼란이 심각했단 이야기다.]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은 [[심장마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옐친은 심장이 좋지 못했는데 1996년에 심장 수술까지 받을 정도였다. 사망했을때도 사인이 심장마비였다.] 다양한 이미지 플레이로 초반 지지율 6%에서 결선투표 진출은 물론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를 54%대 41%로 14% 가량 앞서며 승리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옐친은 '''"배당을 위한 융자"'''라는 악명 높은 합의를 통해 자신에게 선거 자금을 대주는 대가로 [[올리가르히]](재벌)들에게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적 자산 통제권을 나눠주겠다는 범죄적 약속을 했다. 그 같은 조치는 러시아 내에서 올리가르히의 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가즈프롬]]이나 루살 등 에너지나 광물 관련 회사들 등 그 나름대로 흑자를 벌어들이는 사업이 많았는데,[* 원래 소련은 1930년대 산업화 시절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 군수 산업과 관련된 중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하지만 [[1950년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공업 생산력과 경쟁력이 서방보다 떨어지면서 적자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소련 정부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자원 채굴 사업에 많이 기댔고, 실제로도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자원 소득에서 얻었다. 이런 자원의존형 구조는 소련 붕괴 이후 점차 심각해져 오늘날 러시아는 국고의 52%를 자원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의 재벌들 역시 주요 수익이 자원 채굴과 수출이다.] 이런 사업체들이 모두 소련 내 관료나 시장원리에 밝았던 [[노멘클라투라|전직 공산관료들]]이나 권력 핵심부에 있던 정부 관리에 넘어감으로써 벼락부자들이 대거 탄생했다. 이들 중 몇몇은 옐친 집권 몇년만에 세계적인 부호가 될 만큼 큰 재산을 모았다. 이런 벼락부자들의 대표적인 예로는 [[보리스 베레좁스키]]와 [[로만 아브라모비치]] 등이 있다. 소련 시절에는 부동산 및 생산 수단이 국유화되었기 때문에 모을 수 있는 재산은 예금이 전부였고,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이 서방 기준으로 수천 달러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옐친 집권 하에서 자본주의에 빠르게 적응한 이들은 2, 3년 만에 수조에서 수십조원의 자산가가 된다. 게다가 분리 독립을 선포하려던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을 제압하기 위해 당시 체첸 지도자였던 [[조하르 두다예프]]와 협상을 거부하고 무리하게 군을 투입했다. 하지만 체첸군은 아슬란 마스하도프(Аслан Масхадов, 1951년 9월 21일 ~ 2005년 3월 8일) 같은 전직 [[소련군]] 출신 인사들에 의해 훈련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 이미 러시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같은 분쟁이나 1992년 [[조지아 내전]] 때 샤밀 바사예프 같은 체첸계 군인을 보냈던 적도 있었다.]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그로즈니 시로 진입했다가 체첸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제대로 된 보병과 포병, 공군의 지원없이 무리하게 기갑전력을 시가지로 밀어넣은 결과 고층 건물에서 체첸 반군이 내리 쏘는 [[대전차화기|대전차무기]]들에게 뚜껑이 따이고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군은 당시 그로즈니 시가전을 숫제 [[연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1996년 샤밀 바사예프가 주도한 부됸놉스크 병원 인질극과 체첸 반군의 그로즈니 재탈환으로 체첸군에게 패배하면서 결국 1996년 하사뷰르트 협정을 맺고 굴욕적으로 패배를 시인하면서 체첸에 국가나 다름없는 자치권을 준 다음 물러났다. 사실 러시아군으로써는 붕괴 이후 군 조직이 약화되고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체첸에 투입되었으니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개 지방이었던 체첸에 패배한 사실은 러시아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1998년 러시아 정부는 재정 부족으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기까지 이르렀다. 이미 옐친의 권위는 잦은 실정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탄핵]] 직전에까지 몰렸다가 겨우 회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1999년 8월에는 건강까지 좋지 않아 [[KGB]] 출신의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지명했다. 더 이상 평판이 나빠질 일도 없었던 옐친이 마지막으로 내던진 승부수였는데, 이후 건강 이상으로 물러난 옐친을 대신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푸틴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체첸을 공격, 옐친이 5천 명 이상을 죽게 만들고도 해결하지 못한 전쟁을 겨우 2,500여 명의 전사자만으로[* 사실 이 정도의 전사자도 러시아에겐 상당한 피해였다. 그만큼 체첸의 저항이 워낙 거세 고생했던 것.] 러시아군도 큰 피해를 입긴했지만 10년 가까이 지지부진했던 전쟁을 신임 총리인 푸틴이 체첸 반군을 남김없이 쓸어버리며 순식간에 매듭짓자 푸틴은 국민들 사이에서 일약 깜짝 스타로 등극하게 되었다. 여당의 지지율 역시 자연스레 다시 회복되었다. 그 해 12월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들이 선전하였고, 총선에서 선전한 대가로 옐친은 푸틴을 차기 대권 주자로 내정하였다. 옐친은 여기서 더 나아가 그 해 말인 12월 31일, 대국민 신년담화에서 건강 문제[* 실제로 재임 중 건강이 좋지 못해 병원에 자주 갔으며 앓아눕는 일도 많았다.]와 함께 자신의 실정에 대해 사과하면서 임기를 아직 6개월이나 남긴 상태에서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전격적으로 사임을 선언했다.]] 대통령 직무는 푸틴 총리에게 위임되었고 이듬해에 푸틴은 대통령직에 당선되었다. [[파일:4435811_1200x.jpg]] 1999년 12월, 크렘린을 떠날 당시 후임인 [[블라디미르 푸틴]]과 악수하는 모습. 한편 1999년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옐친은 푸틴에게 사임 후에도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푸틴은 이러한 옐친의 요구를 수용해 퇴임한 옐친에게 면책 특권을 보장함으로써 이에 보답하였다.[* 옐친은 이미 대통령일 때에도 임기 중에 많은 뇌물을 받고 부정 축재를 했다는 당시 검찰의 폭로가 있어서 제1야당인 공산당이 재집권할 경우 이걸로 건수를 잡아 퇴임하자마자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푸틴 정권이 승승장구하면서 옐친은 푸틴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일 없이 잘 지내며 한가롭게 야인으로 지내다가 2007년 향년 76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놈의 [[술]] 때문에 건강이 나빠서 죽었다고 한다. 옐친은 살아 생전 지독한 [[주당]]이었다.[* 허나 지독한 주당 치고는 장수한 편인데 그도 그럴게 러시아 남성의 평균수명은 60대다. 이유는 당연히 술 때문이다.] 가족으로는 아내 나이나와 장녀 옐레나와 차녀 타티아나, 외손자 3명이 있다. 그 동안의 소련 지도자들은 대부분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지만 옐친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말 그대로 국가 지도자나 영웅들이 묻히는 크렘린에 비하면 격이 살짝 낮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노보데비치 수도원도 러시아의 위인들이 많이 묻힌 곳으로 유명하며 결정적으로 옐친은 소련의 지도자가 아닌 소련 해체 이후에 러시아의 지도자를 역임했던 사람이다. 옐친 사망 15년 후, 악연의 연속이던 [[고르바초프]]도 같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묻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